한때 이수만 이문세와 함께 '마(馬)삼 트리오'를 이뤘던 것이 말해주는 다소 긴 얼굴, 그러나 특유의 편안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지난 1994년부터 2시간짜리 KBS FM <유열의 음악앨범>(매일 오전 9시-11시)을 11년째 진행해오고 있는 유열은 그러한 특유의 '소프트 캐릭터' 덕분에 '아침의 연인'으로 불린다.
주요 프로그램 청취자들인 주부들은 그 시간대의 주부 일상과 정서를 정확히 읽어내는 유열의 감성에 자진 포로가 되고 만다. 1961년생으로 나이는 어느덧 40대 중반이지만 분명한 총각임에도 불구하고 주부 팬이 많다는 것은 쉬 지나치기에는 적잖이 놀라운 사실이다. 경쟁사 MBC의 한 라디오 프로듀서는 “유열씨의 진행은 단지 부드러워서가 아니라, 주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미가 풍겨나기 때문에 오랜 사랑을 받는다.”고 분석한다.
유열 스스로도 “나에게는 여성적인 뭔가가 있다”고 인정한다. 일각으로부터 듣는 '느끼하다'는 인상도 실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진행자로서 굵직한 자취를 그려낸 대신 결정적인 하나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본업인 가수로서의 앨범활동이었다. 그는 1998년 7집은 낸 뒤 거의 7년이 흘러가도록 새 앨범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가수 아닌 방송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다.
앨범을 낼 것 같지 않던, 앨범을 만들 시간도 없을 것 같던 그가 예상을 깨고 막 새 앨범 < 라르고(Largo) >를 가지고 본연의 터전으로 돌아왔다. 시차가 자그마치 7년이다. '느리게'란 뜻처럼 신보를 참으로 느릿느릿 만든 셈이다. 앨범 내용도 마찬가지로, 푹신한 소파에 앉아 완전 무장해제한 채 듣는 아늑하고 편안한 팝과 가요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일례로 빌리 조엘의 것을 리메이크한 'Just the way you are'는 재즈와 보사노바의 향기가 그윽하다. 앨범제목을 '느리게'로 한 것에 대해서 유열은 “빠르게 돌아가는 각박한 세상에 휴머니즘을 노래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서울 방배동 자택 근처에서 만난 유열은 신보로 의욕을 수혈 받은 것인지, 예의 부드러움에 '에너지'가 부가된 표정으로 가득했다. 새 앨범에 대해서 이런저런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유열의 언변은 방송경력이 말해준다. 인터뷰 톤이 얼마나 잘 정제되고 정리되어 있으면 마치 라디오 진행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일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명료하고 귀에 착착 감겨왔다.
그 놀라운 전달력으로 그는 7년 만에 앨범을 낸 소감, 제작과정 그리고 자신의 포부에 대해서 상세히 털어놓았다. (물론 대중들의 으뜸 궁금증은 몇 해 전 언론에 공개된 그 여성과 언제 결혼하느냐는 것이다. “내 결혼인데 왜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곧 국수 먹여드릴 테니 기다려보세요.”)
왜 그리 오랫동안 앨범을 내지 않은 겁니까?
그 사이 나대로 바빴어요. 노래도 계속했구요. 음악회, 행사, 오케스트라 협연 등에 성실히 임했습니다. 앨범만 안 냈을 뿐이죠. 그리고 제가 하는 사업인 '오디오 북' 일로도 분주했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장이라 고생 중이기는 하지만 그간 '최수종이 읽어주는 미운 아기오리' '조승우가 읽어주는 알퐁스 도데 단편선' 등을 만들었죠. 김용만 최유라 정선희 신애라씨 작품도 있죠. 사는 것은 계속 바빴습니다. 밤일(밤업소출연) 빼고는 다했다고 할까요. (웃으며) 이것까지 했다면 아마 쓰러졌을 거예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그러다보니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대요. 앨범 타이틀 '라르고'처럼 유유자적하지는 못했던 거죠. 제가 또 일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음악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래요. 그간 (가요의) 트렌드가 너무 강해 보였어요. 유행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상황이 계속되었죠. 거기에 내 것을 심기란 쉽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러니 내가 좀더 성숙해진 다음에 앨범을 내고 싶었습니다. 편하게 노래 부를 수 있을 때까지 '익기'를 바랐던 거죠. 그게 4-5년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갔네요, 참.
리메이크 앨범입니다. 수록 곡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죠.
팝송과 가요를 반반 정도 섞었어요. 좋아서 하고 싶은 곡들이죠. 가장 애창하는 레퍼토리인 윌리 넬슨(Willie Nelson)의 'Always on my mind'를 비롯해서 빌리 조엘(Billy Joel)의 'Just the way you are', 모리스 앨버트(Morris Albert)의 'Feelings'에다 가요는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번', 조용필의 '친구요', 김건모의 '미련',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등이죠. 드라마 < 겨울연가 >에서 부른 '제비꽃'도 수록했습니다. '우연'은 신곡이구요.
후배 김건모의 '미련'이나 이소라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는 좀 뜻밖이에요.
이번 앨범의 프로듀서는 '다섯 손가락' 출신의 이두헌이구요. 방송을 4년간 같이 한 인연도 작용했지만 두헌이는 프로듀서로서 굉장한 역량을 지닌 친구로 봅니다. 우선 날 많이 알죠. '미련'은 김건모가 너무 잘 부른 곡이라서 리메이크할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한번 노래방에 가서 불렀는데 이두헌이 '형 톤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소라의 것은 그의 5집에 숨겨진 좋은 노래인데 역시 이두헌이 선곡했죠. 'Try to remember' 'Feelings'도 그가 골랐습니다.
마침 리메이크가 범람이라고 할 정도로 마구 출시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부담이 됐을 것 같은데...
앨범을 준비한 것으로 보면 1년이 훨씬 넘어요. 그 사이 너무 쏟아져 나오니까 타이밍 상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남한테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헌이와도 얘기했습니다. 현실과 무관하게 '우리 길을 가자!'구요. 솔직히 요즘 리메이크 앨범은 급조된 것, 컬러가 없는 것도 많아요. < 라르고 >는 그런 상황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자부합니다.
오랜만의 녹음인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간 라이브를 쭉 해오긴 했지만 막상 음반녹음은 달라요. 오랜만에 녹음실에 들어가니까 감(感)은 어색했지만 참 새롭던데요. 전체적으로 이두헌과의 호흡이 잘 맞았습니다. '그 분이 오셨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아쉬워하면 그도 아쉬워했고... 자연스러웠어요. 사실 두헌이의 권유 때문에 이번 앨범작업이 가능했습니다. 솔직히 앨범을 반드시 내야한다 즉 머스트(must)는 아니었으니까요.
'느리게'라는 콘셉을 잡은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잉거 마리(Inger Marie), 노라 존스(Norah Jones), 잭 존슨(Jack Johnson) 등 9.11 사태 이후 전 세계적으로도 어쿠스틱에 진솔하고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문화가 주목받았잖아요. 저도 그 정서가 좋았어요. 아무래도 스탠더드는 시대를 넘어서는 음악이고 따스하죠. 액세서리는 빼고 단촐하게 심플하게 가자, 그러나 연주의 내공은 있어서 맛이 있는 음악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순수와 인간미가 신보의 방향이었겠네요.
노래도 컬러를 바꿨어요. 적어도 순수하게 보다는 '섬세하게' 쪽으로요. 예전에는 '순수한 열창'이었다면 이번에는 한 곡 한 곡 느끼면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꼭 양질의 연주와 편곡이 필요했죠. 이두헌은 물론 유키 구라모토, 이호준, 나원주, 이루마 등의 참여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앨범 중 처음이었어요. 연주와 동화되면서, 소리를 다 내지 않지만 여유가 있는 음악이랄까. 아무튼 자랑하는 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유열은 1986년 10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를 가지고 출전, 대망의 대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다. (경쟁자가 '첫 눈이 온다구요'의 주인공인 금상 수상자 이정석이었다) 곡은 피아노를 치는 친구 지성철이 작곡한 곡이었는데 그 친구도 곡을 처음 써본 것이라고 한다. 술 마시다 멜로디가 떠올라 여관으로 달려가 단숨에 썼다는 것이다. 유열도 “어떻게 그랬나 몰라요. 되려고 그랬는지... 노랫말도 내가 쓴 것이거든요.”라고 회고한다.
이듬해 정식 독집을 낸 그는 거기서 지금도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이별이래'로 빅 히트를 쳤으며 그때부터 '잊을 거야' '화려한 날은 가고' '에루화'와 같은 히트송으로 '89년까지 내리 3년간 KBS, MBC 연말 10대가수로 선정되는 등 전성기를 누린다. 앨범활동 외에 그는 < 하늘을 나는 양탄자 > < 요셉 어메이징 드림코트 > < 빠담 빠담 빠담 > 등의 뮤지컬 무대도 누비면서 '멀티 엔터테이너'로서 명성의 둘레를 가꾸었고, TV와 라디오 진행으로도 활동보폭을 넓혀 안방의 친숙한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새 천년 들어서는 한류의 폭풍이었던 드라마 < 겨울연가 >에 출연, 거기서 부른 '제비꽃'으로 일본에서도 연기자와 가수로 동시 호응을 창출하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2005년 3월에 낸 베스트 앨범은 일본에서도 출시되었을 정도. 지난 11월23일에는 1500명을 수용하는 오사카 소재의 빅 아이(BIG I)홀에서 성공적인 단독 공연을 갖기도 했다. 신보는 물론 여러 가지 상황이 그의 얼굴에 자신감의 빛을 드리운 것이다.
앞으로 연기도 할 계획인지
그렇지 않아요. < 겨울연가 >도 음악분야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선배 역할이라서 한 거에요. 드라마에 출연해서 연기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연기자로 뛸 마음은 갖고 있지 않아요.
대학가요제 출신 선배로서 올해 네티즌으로부터 관심이 폭발한 올해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자 익스(Ex)와 이상미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프로를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그때 학창시절에 맞는 건강함, 모험, 순수가 대학가요제의 핵심이죠. 익스도 새롭고 실험적인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봐요, 요즘 대중스타는 너무 준비되고 가공된 경우가 많잖아요. 더 건강할 수 있는데 그렇질 못해요. 그런 상황에서 새로움이나 실험적인 것이 나오면 대중들은 움직이게 되어있어요. 오랜만에 그게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가웠어요.
본인의 곡 가운데 맘에 드는 곡들은. 또 어느새 7집까지 냈는데 앨범은 그 가운데 어떤 게 흡족한지.
아무래도 연(椽)을 만들어준 곡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를 빼놓을 수 없죠. 나의 시작이고 흐뭇하고... 1987년 가을의 '이별이래'는 곱씹는 맛이 있는 곡입니다. 1988년 가을, 2집의 '화려한 날은 가고'는 지금도 가끔 재즈 보컬로 초대받는 곡이죠. 스윙의 맛이 있잖아요. 사실 앞으로 그와 같은 스윙을 해보고 싶거든요. 앨범의 경우는 완성도로 볼 때는 이번 앨범이구요, 추억으로 따지면 '이별이래' '가을비' '잊을 거야'가 수록된 1집입니다. 고 김명곤씨가 프로듀스했는데 신보처럼 여러 뮤지션이 참여했죠.
평소 좋아했던 음악은 어떤 것들인가요.
앤디 윌리엄스(Andy Williams)의 'And I love you so'를 잊을 수 없네요.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 냇 킹 콜(Nat King Cole) 등 주로 스탠더드 음악들 쪽이었어요. 우리 가수로는 분위기 때문에 장현이 좋았고, 김정호의 읊조리는 듯한 노래에도 끌렸지요. 노래에 대해 감탄한 가수는 이광조입니다. 그는 앨범보다 라이브할 때가 더 맘에 들어요. 조동진과 고 김현식은 소울이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노래로 얘기하는 사람들이었죠.
그는 신보로 시작해서 신보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번 노래들은 여러 가지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습니다. 잘 들어주세요. 한마디로 축하받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어른이 된 다음에 시작하는 것 같은 음반입니다.”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부담 없이 1년에 한 장이든 2장도 좋고, 계속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유열이 할 수 있는 음악을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낼 생각이라고 했다.
가수로 돌아왔으니 공연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 지난 12월4일 건대 새천년 홀에서 이미 신보발표 콘서트를 가졌다. “어쩌면 올 봄쯤 시작해서 20개 도시 이상 전국 투어에 나서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마침 올해는 데뷔 20주년이다. 그는 20년을 맞는 올 공연 스케줄로 기대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