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겔도프(Bob Geldof)
활동시기 : 1980, 1990년대
데뷔/결성 : 1986년
솔로
1978년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 음악학부 마이클 시아노 교수는 학생들에게 모차르트, 바하, 브람스와 함께 비틀스를 알아야만 졸업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비틀스라고 하는 악성을 공부하는 것은 브람스를 연구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팝계는 비틀스라는 세기적 천재를 보유해 비록 ‘딴따라판’이지만 악성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악의 범주를 초월한 완전한 성자(聖者)를 팝계가 맞이하기까지는 좀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1985년이 대망의 성자 탄생의 해였다. 이 영예로운 칭호의 주인공은 밥 겔도프라는 비교적 생소한 이름의 가수였다. 그 해 그는 ‘성자 밥’(Saint Bob)이라는 칭호 획득에 그치지 않고 유력 정치가나 고명한 외교관도 아니면서 당당히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대되었다. 영국의 앨리자베스 여왕은 그에게 명예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를 이처럼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부상시켜준 사건은 다름아닌 라이브 에이드(Live Aid)였다. 우리는 85년 7월 13일 국내에도 중계방송된 ‘아프리카난민 구호 자선공연’이었던 라이브 에이드의 장관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과 미국 필라델피아 JF 케네디 스타디움을 동시 연결한 이 공연에는 흘러간 그리고 당대의 톱스타들이 총출동했고, 16만2천 명의 관중과 1백4개국의 20억 TV시청자가 지켜보았다. 이 슈퍼 와이드판 무대의 기획자가 바로 밥 겔도프였다.

한줄기 빗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듯 라이브 에이드라는 사상 초유의 대륙간 콘서트는 그의 우연한 TV 시청에서 비롯되었다. 84년 11월 어느날 밥 겔도프는 평소처럼 무심코 BBC의 저녁 뉴스에 채널을 맞췄다. 거기서 그는 마이클 부어크 기자와 모하메드 아민 카메라 기자 취재팀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통해 수백만 이디오피아인들이 굶어 죽어가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굶주림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1만 명의 생존자들 가운데 3백 명을 구조대가 골라내 며칠간 더살라고 할당량만큼의 버터오일을 발라주는 장면, 나머지는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다 맥없이 쓰러지는 장면, 생존자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에 파리가 들끓는 장면, 그 장면들을 겔도프는 보았다.

“그날 밤 난 완전히 말문을 잃어버렸습니다. 충격에 전율이 엄습해왔습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듯 그는 즉각 다음날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개인적으로 친분있던 그룹 울트라 복스의 미지 유어에게 전화 다이얼을 돌렸고 두 사람은 서둘러 자선곡 하나를 만들었다. 그 노래는 ‘오늘이 크리스마스인 것을 그들은 아는가?(Do they Know It`s Christmas?)’였고 밥 겔도프는 이 노래를 부를 임시합창단을 결성하여 영국의 내노라 하는 41명의 록 스타들(사이몬 르봉, 스팅, 조지 마이클, 보이 조지, 필 콜린즈 등)의 참여를 구했다. 이 자선 단체의 이름은 밴드 에이드(Band Aid)였다. 하루빨리 이디오피아 난민을 위해 응급조치라도 취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응급처치용 반창고 제품명을 따 붙였다.

겔도프는 이 음반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기획 의도만 이해해주어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순식간에 3백만장이 팔려나갔고 영국 차트 1위까지 치솟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자신이 생긴 그는 이디오피아와 수단을 직접 탐사한 뒤 그 국가들에 식량 의료품 차량을 공수하기 위한 파이프로서 ‘밴드 에이드 트러스트’를 설립, 모금에 앞장섰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미국 가수들도 가만히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대중음악에 관한 한 미국은 늘 영국에 한 발 뒤진다). 재빠르게 아프리카를 위한 아티스트연합(USA for Africa)이 조직되었고 유명한 ‘세계는 하나(We are the World)’가 발표되었다. 미국의 국제문화 유통 영향력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이 노래가 영국의 것보다 더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영국의 밴드 에이드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밟은 미국 팝계의 대응책에 불과했다. 좁혀 들어가면 대서양 저편의 영국 가수인 ‘겔도프 착상’의 미국판인 셈이었다. 뒷북을 치다보니 뭔가 더 ‘세게 나와야 했고 그래서 이디오피아에서 구호지역 범주를 아프리카 전체로 확대시켰다는 점이 다르긴 했지만...

밥 겔도프는 자기 기획에 미국측이 선뜻 따라오자 신바람이 들려 더 큰 기획을 결행키로 했다. 영국과 미국의 것을 합쳐 큰 판을 벌여보자는 생각이었다. 밴드 에이드가 하던 식으로 미국 가수들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서 합의를 얻어냈고 영미 합동 무대를 준비하는 데 10주간 만전을 기했다.

이리하여 사상 초유의 대륙간 공연 라이브 에이드가 가시화되었다. 그에게 악몽처럼 붙어다닌 아프리카의 가난과 굶주림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밥 겔도프의 숙원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는 라이브 에이드 당일 무대에서 감격하여 외쳤다.

“이는 지구 최대의 쇼가 아니다. 이는 은하계 최대의 공연이다!”

이날 음악은 구실에 불과했다. 실질적 모티브는 ‘양심’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양심이었다.

이같은 ‘대의명분’이 있었기에 라이브 에이드는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때 많은 젊은이들은 공동체의식이 살아 숨쉬는 이상사회를 갈망하여 그곳에 모여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한 가수들의 노래를 경청했다. 엘튼 존은 "라이브 에이드는 우리를 우드스탁으로 인도하는 다락방과 같다"고 했고, 닐 영은 "우드스탁 때 우린 무언가 일어나길 고대하며 함께 모였고 이번에는 누군가 도와주기 위해 함께 모였다"고 말했다. ‘비치 보이스’의 마이크 러브는 "라이브가 극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드스탁보다 휠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평면적인 두 공연의 비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라이브 에이드와 우드스탁 간에 분명한 동질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드스탁은 60년대 록 음악의 사회성이 융화해 발현된 행사였고, 라이브 에이드는 60년대 이후 잠들고 있던 록의 사회적 의식이 다시 깨어났음을 보여준 산 증거였다. 밥 겔도프와 라이브 에이드가 록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겔도프는 ‘60년대 록 음악의 사회의식’을 일깨워 그것을 ‘자선’의 형식으로 표출시켰다는 점을 평가받았다. 가수가 돈벌어 안락하게 사는데 만족해서는 안되고 사회에의 기여에 눈떠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던 당시 영미 사회에서 자선은 록 스타가 실행할 수 있는 최고지향점이었다. 그래서 겔도프는 라이브 에이드를 ‘팝계가 할 수 있는 최종적 표현’이라고 언급했던 것이었다.

겔도프 본인은 자신의 자선활동을 오히려 60년대 정신이나 우드스탁보다 ‘높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라이브 에이드는 60년대의 이상주의와 때로는 터무니없는 행동주의를 초월했다는 것이다. 그는 "행동주의란 기본적으로 말만 떠벌리고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며 "라이브 에이드는 이러한 행동주의(activism)와는 반대되는 의미로서 행동(activity) 그 자체였다"고 주장했다. 어찌됐든 그의 자선행동에 60년대의 ‘저항’ 정신이 배어 있다는 점에는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영국의 우익 이노크 파월 의원으로부터 ‘비밀 제국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타임>지의 제이 칵스 기자는 겔도프를 ‘사회 복음주의자’로 언급했다. 자선을 위한 ‘피리부는 사나이’가 되어 전세계에 자선공연을 유행처럼 퍼뜨렸다는 것이었다. 라이브 에이드 이후 세계20개국에서 그와 비슷한 자선공연이 잇따랐고 팜 에이드, 메틀 에이드, 캐나다 에이드, 패션 에이드, 스포츠 에이드 등 별의별 에이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밥 겔도프는 아일랜드 더불린 태생으로 1953년생이다(록 스타 가운데는 아일랜드인이 많은데 밴 모리슨,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 유투 멤버 전원, 시네드 오코너, 개리 무어, 엔야 등이 대표적이고 저항 색채의 가수가 많다는 게 특징). 일찍부터 사회 복음주의 성향을 보여 ‘핵 폐기’ 캠페인을 주도하고 ‘공동체의 일’에 적극적이었다. 모험심이 남달라 불도저 운전사, 공장 직공, 사진사, 영어 교사 등 많은 직업을 거쳤으며 특기할 사항은 한때 신문기자로도 활약했고 말재간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75년 영국의 펑크 밴드 ‘붐타운 래츠’에 가담했으나 연주를 못하고 대신 화술이 좋아 그룹의 매니지먼트를 맡았다. 그러나 보컬리스트가 기타리스트로 전환하면서 겔도프는 리드 싱어로 궤도 수정했다. 79년에 이르러선 유럽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라는 평을 받을 만큼 주가가 급상승했으며, 불타는 스테이지 액션이 화제를 모아 ‘겔도프 댄스’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85년까지 6매의 음반을 발표했고, 그간 ‘쥐덫(Rat Trap)’, ‘난 월요일일 싫어(I don`t like Mondays)’ 등의 영국 차트 1위곡을 냈다. 그러나 겔도프는 그룹의 싱어로 활약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펼쳐보이려는 시도를 했고 그 일례로 82년에는 핑크 플로이드 음반을 영화화한 알란 파커 감독의 <벽>에 주연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밥 겔도프의 영광과는 반대로 그룹 붐타운 래츠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라이브 에이드가 끝난 후 레코드 회사와 계약 협상시에 회사들로부터 “붐타운 래츠는 한물갔으니 안되고 당신의 솔로 음반이나 내자”는 제의를 받고는 “그룹 나머지 멤버들을 빼면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인류애가 눈물겹다!)고 버텼으나, 그룹이 워낙 하향세인 터라 86년 붐타운 래츠는 해산하고 말았다.

음악 외적인 면에서 그는 성자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음악 부문에서는 제대로 된 스타덤 한번 맛보지 못했다. 사실 붐타운 래츠는 펑크 그룹이면서 혁명적 정신이 전혀 없었고 영국에선 전성기가 있긴 했지만 미국에서는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다. 솔로 활동도 별로 탐탁치 않아 86년 <어디에도 갈 수 없는 내 마음(Deep in the Heart of Nowhere)>, 90년 <사랑의 채식주의자들(Vegetarians of Love)> 등의 음반을 발표했으나 판매도 평균 이하, 비평도 평점 이하였다.

앨범 수록곡 전체 기류는 그가 갈등에 휘말려 있으며, 따라서 한 길을 파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 드러냈다. 라이브 에이드의 관리자라는 위세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과 음악의 대중적 접근을 위해서는 그런 무거운 이미지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의 기로에서 빚어진 갈등이었다.

두 가지 모두 그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해 겔도프는 어느 한 부문에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86년도 노래 ‘밤은 낮으로 변한다(Night Turns to Day)’는 이를 상징하고 있는 곡으로, 여기서 그는 어린이를 세상의 추함으로부터 보호해야겠지만 어린이가 세상의 추함에 무관심해버리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지는 항상 유일하고 진정한 도덕적 알리바이지. 그러나 난 너를 보호하려고 노력하진 않을 테야. 네가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말야.’

‘세상의 무관심’과 ‘약자의 각성’ 사이의 중간에서 어느 쪽에도 기울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흔적이 엿보인다. 90년에 와서는 약자의 각성을 촉구하기보다는 세상의 무관심을 힐난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해 중심이 잡혔음을 팬들에게 알렸다.

‘난 제3세계가 더위에 튀겨지고 있다 해도 관심없어. 더 더워져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나는 모든 나라가 죽어가는 걸 지켜볼 수는 있지만 신경쓰진 않아.’ ‘무관심의 가장 위대한 노래(The Great Song of Indifference)’

<사랑의 채식주의자들>의 수록곡 중의 하나인데 비판조는 아니지만 수준있는 조롱으로 무관심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86년 <LA타임즈>지의 로버트 힐번 기자는 겔도프를 향해 이런 부탁을 했다. “이디오피아의 고통에 세계가 아무리 무관심하더라도 겔도프는 과거 팝 공동체를 일순간 일궈냈듯 다시 한번 그것을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러나 그는 활력을 잃었다. 언제 다시 그가 대사를 꾸려낼지는 모르지만 현재로 그는 세상의 무관심에 집착하다가 쓰러져가는 것 같다. 밴드 에이드 트러스트는 92년 막을 내렸다.

아무리 그가 지금, 아니 앞으로 계속 원기를 잃어간다 해도 ‘겔도프의 날’, 즉 85년 7월 13일은 영원히 별도로 기억될 것이다. 그날 이전까지 그는 그저 재능있는 한 명의 가수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는 성자로 추앙되었고 노벨상 후보, 명예 기사가 되었다. 그날 그는 자선 물결을 만들었고 60년대의 사회의식을 복원, 새로운 시대 정신을 창조했다.

그는 ‘내가 젊었을 때(When I was young)’라는 노래에서 ‘난 수백만 가지를 할테야. 1천 가지 기획을 꿈꾸고 말야. 난 매일 밤 세상을 변화시킬거야’라고 했다. 정말 그는 천 가지 아닌 단 한 차례의 기획으로 세상을 바꾸어버렸다.
1993/04 임진모(jjinmoo@izm.co.kr)
  • 1993
    The Happy Club
  • 1990
    Vegetarians Of Love
  • 1986
    Deep In The Heart Of No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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