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형의 펑크에 가스펠 하모니를 엮어 능란한 혼 섹션과 다양한 악기로 채색해낸 그들의 연주는 가히 흑인음악에 관한 한 ‘백과사전’ 사운드로 불릴만했다. 리더이자 프로듀서인 모리스 화이트(Maurice White)의 실험적 음악아이디어와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악기 칼림바(Kalimba) 연주 그리고 1971년 가입한 필립 베일리(Philip Baily)의 가성 보컬은 즉각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유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펑크 음악은 소울에 이어 모든 악기연주를 동원하는 ‘밴드’의 개념(흑인이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주한다!)에 흑인 본래의 아프리카 연주감성을 복원한다는 실천의지(아프리카로 돌아가자!)가 낳은 산물이었다. 아프리카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멀티리듬과 정글리듬이 생명이다.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바로 이것을 미국 대륙에 이식하려는 모리스 화이트의 웅대한 야심에 의해 탄생되었다.
1941년에 태어난 뉴올리언스의 술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할아버지의 재질을 이어받아 시카고 콘서버토리 음악학교에서 교사가 될 목적으로 작곡과 퍼커션 연주를 전공했다. 그러나 직업으로 방향을 바꿔 1962년에 전설적인 시카고 체스레코드사로 들어가 정규 세션 드러머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척 베리, 하울링 울프, 머디 워터스, 임프레션스, 폰텔라 배스 등의 레코딩에 참여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램시 루이스 트리오(Ramsey Lewis Trio)와 함께 내리 10장의 앨범 작업을 하면서 아프리카 재래의 악기로 엄지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독특한 음색의 피아노형 악기 칼림바를 소개하게 된다. 그는 1960년대에 중동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문화에 매료되었고, 이것은 나중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음악은 물론 앨범커버에 반영된다.
1969년 말 솔티 페퍼스(Salty Peppers)란 이름으로 함께 활동한 웨이드 플레몬스와 돈 화이트헤드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한 모리스 화이트는 밴드 명을 어스 윈드 앤 파이어로 바꿔 그들의 역할을 조정하고 동생 버딘 화이트를 끌어들여 라인업을 완성한다. 1971년 그룹 타이틀을 내걸어 워너브라더스 레코드에서 앨범
2집
4집 가 골드, 5집
하지만 1974년 말에 제작에 들어간 사운드트랙 앨범
이 시기부터 1979년에 발표한 앨범까지 내리 6장이 모두 각각 2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 대표적 흑인그룹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마법적 장치와 불꽃 조명을 내세운 진보적인 스테이지 쇼로 관객들을 사로잡던 1976년부터 1979년까지의 전성기에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중적 인기와 영향력을 과시했다.
싱글도 잇따라 호조를 보여 1976년 ‘Sing a song’은 5위, ‘Getaway’는 12위, 1978년 비틀스 곡을 펑키하게 재해석한 ‘Got to get you into my life’(비지스와 피터 프램튼이 주연한 비틀스 소재의 영화
1979년 흑인 여성그룹 이모션스(Emotions)와 함께 부른 ‘Boogie wonderland’는 6위, 그리고 그들로선 드문 발라드 ‘After the love is gone’는 2위까지 올랐다. 뒤의 곡은 훗날 당대의 프로듀서로 떠오른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가 썼다. 데이비드 포스터를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곡이기도 하며 선율의 마법사답게 멜로디가 압권인 덕에 지금도 애청되고있다. 또한 1978년 32위에 그친 ‘Fantasy’는 비록 당시에는 히트하지 못했으나 나중 1995년 내한한 호주출신 그룹 CDB가 리메이크하는 등 새롭게 알려지면서 골든 레퍼토리로 상승했다.
이 무렵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지휘자 모리스 화이트는 히트제조기로 명성을 떨치면서 이모션스, 데니스 윌리암스, 웨더 리포트가 소속된 외부 프로덕션마저 설립했으며, 독특한 제작스킬에 대한 수요가 급등하면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닐 다이아몬드, 제니퍼 할리데이 등의 음반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작곡자 프로듀서로서 시대를 갈랐던 비지스의 배리 깁이 부럽지 않을 기세였다.
1980년에는 유럽과 남미 순회공연을 가지면서 지구촌밴드의 위치를 다졌으며 이듬해 낸 앨범
대중적 인기와는 멀어졌지만 어스 윈드 앤 파이어는 음악적 조류에 맞춰 1990년